숫자가 눈을 의심케 했다. 코스피는 하루 만에 655.32포인트(7.89%) 급락하며 7,648.09로 내려앉았다. 장중 매수 사이드카가 아닌 매도 사이드카가 작동할 만큼 패닉이 깊었다. 미 증시발 지능형 연산 칩 인프라의 공급 과잉 공포가 국내 시장의 목덜미를 잡은 꼴이다. 코스닥도 866.72(-6.74%)로 미끄러져 피할 곳이 없었다. 어디가 바닥인지 솔직히 나도 가늠이 안 된다.
미국 메타(Meta)가 자체 클라우드 인프라 사업에 뛰어든다는 소식이 방아쇠였다. 빅테크들의 지능형 연산 인프라 투자가 한계에 달했고, 결국 칩 공급 과잉 국면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시장을 덮쳤다.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가 직격탄을 맞았다.
그런데 — 만약 메타의 이번 행보가 공급 과잉이 아니라 새로운 수요 생태계를 만드는 예고편이라면 어떨까. 반사실적으로 뒤집어보면, 빅테크의 칩 내재화 시도가 제조사들의 중장기 단가 하락 압력으로 고착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의 시장은 그런 복잡한 시나리오를 기다려주지 않고 매도 버튼을 먼저 눌렀다.
삼성전자는 9.06% 밀린 28만 6,000원, SK하이닉스는 무려 14.57% 폭락한 218만 7,000원으로 주저앉았다. 하이닉스의 하루 낙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지능형 가속기 시장의 독점적 랠리가 끝나간다는 의심이 투매로 이어졌다.
바닥을 알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정도로 매물이 쏟아질 만큼 펀더멘털이 망가졌는지 의문이다. 만약 다가올 실적 시즌에서 메모리 제조사들이 여전한 수주 실적을 보여준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의 폭락은 과도한 공포가 만들어낸 일시적 이탈로 판명될 수 있다. 하지만 파는 물량이 이만큼 나온 이상, 분위기가 돌아서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반도체 조정의 골은 깊었다. 낸드플래시 주요 제조사 중 하나인 키옥시아홀딩스의 주가가 장중 한때 15% 가까이 곤두박질쳤다. 올해 들어 지능형 연산 메모리 붐을 타고 주가가 크게 뛰었던 만큼, 글로벌 기술주 조정 국면에서 차익 실현을 겨냥한 물량이 폭포수처럼 쏟아진 셈이다. 여기에 애플이 기존 공급망을 넓혀 중국산 제품 채택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심리를 더 위축시켰다.
만약 애플의 공급망 다변화가 단순한 가격 협상용 카드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반사실적으로 생각해보면 키옥시아의 실질적 지배력 손실은 예상보다 미미할 수 있다. 하지만 단기 과열되었던 시장은 작은 빈틈에도 쉽게 흔들린다. 낸드 시장 전반의 단기 단가 불확실성이 더해지면서, 동아시아 반도체 벨트 전체가 냉기류에 휩싸였다.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이 4.3조 원, 기관이 2.0조 원을 순매도했다. 개인 투자자들이 6.2조 원 넘게 받아냈으나 쏟아지는 물량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555.80원 선을 지키며 여전히 높은 고도를 유지했다.
물량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환율 부담이 지속되는 상태에서 외국인이 먼저 짐을 싸서 나가는 모양새다. 만약 환율이 1,500원 밑으로 꺾이지 않는다면 외국인 수급이 단기간에 돌아올 리 만무하다. 수급의 실타래가 환율과 얽혀 있는 상황이다. 이 수치가 고착화될까 봐 개인적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이 처참한 붉은 벌판에서 유독 푸른빛을 낸 곳이 있다. KB금융, 신한지주, 하나금융지주 등 주요 금융주들은 시장의 폭락을 무색하게 만들며 견고한 상승 흐름을 이어갔다. 2분기 깜짝 실적 기대감과 함께 시장금리 상승에 따른 순이자마진(NIM) 개선 메리트가 부각된 덕분이다. 주주환원에 공을 들이는 매력까지 더해져, 불안한 자금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됐다.
그런데 — 만약 금리 인상 기조가 꺾이고 자산시장 전반이 침체로 돌아서도 은행주의 이 견고함이 유지될 수 있을까. 수익률 키맞추기 성격의 자금 이동일 뿐이라 장기 랠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그럼에도 당장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방어주로서의 몸값은 당분간 유효해 보인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음 흐름을 짚어보자면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실제 연산 서버 인프라 지출이 정말로 꺾이는지 여부다. 감축 공시가 사실로 확인되면 시장은 추가 하방을 시험할 수 있다. 둘째, 1,550원대에 달한 원·달러 환율이 아래로 꺾이는지다. 셋째, 공포에 질린 개인들의 반대매매가 쏟아져 나오는 속도가 잦아드는지다.
만약 주말 전 미국 빅테크 측의 투자 유지 발표가 나온다면? 오늘의 낙폭은 일부 만회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금이 간 공급 과잉에 대한 공포가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라는 찜찜함이 남는다. 틀릴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 차트가 보여주는 신호는 당분간 보수적으로 지켜보라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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